가미무라 히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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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미무라 히코노조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사쓰마번 출신이다. 보신 전쟁에 참전했으며,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청일 전쟁에서 아키츠시마 함장으로 펑도 해전에 참전하여 일본 해군 최초로 적 함선을 항복시켰고, 황해 해전에서도 활약했다. 러일 전쟁에서는 제2함대 사령장관으로 울산 해전에서 승리하고,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 함대의 진로를 막아 승리에 기여했다. 해군 대장까지 진급했으며,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 제1함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07년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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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무라 히코노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작위 | 남작 |
이름 | 가미무라 히코노조 |
원어 이름 | 上村 彦之丞 |
원어 이름 (언어 코드) | jpn |
출생일 | 1849년 5월 1일 |
사망일 | 1916년 8월 8일 |
출생지 | 가고시마, 사쓰마 번 |
사망지 | 도쿄,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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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일본 |
군종 | 일본 해군 |
복무 기간 | 1871–1914 |
최종 계급 | 해군 대장 |
지휘 경력 | 마야 초카이 아키쓰시마 제2함대 요코스카 진수부 제1함대 |
주요 참전 | 보신 전쟁 청일 전쟁 황해 해전 러일 전쟁 울산 해전 쓰시마 해전 |
기타 활동 | 최고 군사 회의 |
기타 정보 | |
별명 | 뱃사람 장군 |
묘소 | 가마쿠라시 묘혼지 아오야마 묘지 |
2. 생애
가미무라 히코노조는 사쓰마번 출신으로, 도바·후시미 전투와 아이즈 전쟁에 참전한 후 해군에 입대했다. 해군병학교 재학 시절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의 훈계로 학업을 마치고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청일 전쟁에서는 아키쓰시마 함장으로 풍도 해전과 황해 해전에서 활약했다. 특히 풍도 해전에서는 일본 해군 최초로 적함 차오키앙(操江)을 항복시키는 전과를 올렸다.[7]
러일 전쟁에서는 제2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울산 해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격파하고, 쓰시마 해전에서는 발틱 함대의 진로를 차단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로 1907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전후에는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관, 제1함대 사령관을 역임하고 해군 대장으로 퇴역했다. 탁월한 군공으로 원수가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당시 계급이 중장이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가미무라는 강직하고 거친 성격으로 인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해군교육본부장과 군무국장을 역임하는 등 군정에서도 활약했다. 또한 상비함대 사령관으로서 지휘한 병학교 30기 원양 항해는 일본 연습함대의 시작이었다.[6]
1899년 2월 1일부터 1900년 5월 22일까지 전함 아사히를 타고 대영 제국을 방문했으며, 그 기간 동안 소장으로 진급했다.
러일 전쟁 초기에 제2함대 지휘관으로 임명된 가미무라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러시아 순양함 전대를 봉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러시아 함대가 탈출하여 1904년 4월과 6월 동해에서 일본 수송선을 침몰시킨 후, 그는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을 샀고, 폭도들이 그의 도쿄 자택을 공격했으며, 신문들은 그가 자결해야 한다고 암시했다. 그는 울산 해전에서 1904년 8월 14일 러시아 순양함 류리크를 격침시키고 순양함 그로모보이와 로시야에 피해를 입히면서 행동으로 자신을 변호했고, 정부와 일본 대중 모두에게서 인기를 되찾았다. 순양함 이즈모를 지휘하면서, 가미무라는 이후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전에서 제2함대를 이끌었다.
1905년 요코스카 해군 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된 가미무라는 1909년 제1함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불과 2년 전 화족 귀족 제도를 통해 남작이 된 가미무라는 1910년 12월 1일에 정식 대장이 되었다. 다음 해 최고군사 회의의 멤버가 된 가미무라는 1914년 5월 1일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 1916년에 사망했다.
그의 묘는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의 묘혼지 사찰에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보신 전쟁
사쓰마번 한학 훈장 가미무라 도이치로(上村藤一郎)의 장남으로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가고시마성 아래 히라노마치(현재의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히라노마치)에서 태어났다.[3] 도바·후시미 전투, 아이즈 전쟁에 참전했다.[4]해군병학교 기숙사에 들어갔지만, 재적 중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하자 가미무라도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이고의 훈계로 다시 병학교 기숙사로 돌아왔다. 야마모토 곤노효에, 히다카 소노조 등이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다. 재학 중 성적이 나빠, 후에 해병 2기에서 4기로 졸업했지만, 전체 학생이 응시한 시험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운요함 승무원으로 재교육을 받은 후 소위보 시험에 합격했다. 4기생으로 졸업했지만, 석차는 역시 최하위였다.[5]
1871년에 메이지 정부 수립 후, 일본 제국 해군 사관학교의 최초 생도 중 한 명이 되었고, 1879년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다. 1880년대에 다양한 함정에서 하급 장교로 복무한 가미무라의 첫 지휘는 1891년 포함 였으며, 이후 1893년에는 의 함장을 맡았다.
2. 2. 해군 입문 및 초기 경력
사쓰마번 한학 훈장 가미무라 도이치로(上村藤一郎)의 장남으로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가고시마성 아래 히라노마치(현재의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히라노마치)에서 태어났다.[3] 도바·후시미 전투, 아이즈 전쟁에 참전했다.[4]해군병학교에 진학했지만, 재학 중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한 것을 계기로 가미무라도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이고의 설득으로 병학교로 돌아갔다. 야마모토 곤노효에, 히다카 소노조 등이 행동을 함께 하고 있다. 재학 중 성적은 불량하여 후에 해병 2기에서 4기가 되어야 할 학생 전원이 치른 시험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운요함 승무원으로 재교육을 받은 후, 소위보 시험에 합격. 4기생으로 졸업했지만, 석차는 역시 최하위였다.[5]

하지만 장관이 된 후에는 해군교육본부장이나, 군무국장을 역임하는 등 군정 면에서도 활약했다. 또한 상비함대 사령관으로서 지휘한 병학교 30기의 원양 항해는 일본이 사령관을 두고 실시하는 연습함대의 시작이다.[6]
1880년대에 다양한 함정에서 하급 장교로 복무한 가미무라의 첫 지휘는 1891년 마야 함장이었으며, 이후 1893년에는 쵸카이 함장을 맡았다.
가미무라 히코노조의 초기 해군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
---|---|---|
1869년 | 혼조 4초메의 타구치 학원에 통학 | |
1871년 9월 | 해군병학료 입학 | |
1875년 11월 - 1876년 4월 | 미국 순항 | |
1876년 9월 | 운요 승무 | |
1877년 6월 | 소위보 | |
1878년 | * 4월 | 모우슌 승무 |
1879년 9월 | 해군 소위 | |
1881년 12월 | 해군 중위 | |
1883년 4월 | 세이키 승무 | |
1884년 4월 | 해군 대위 | |
1885년 12월 | 치요다 항해장 | |
1886년 7월 | 아마기 분대장 | |
1887년 10월 | 야마토 부장 | |
1889년 5월 | 요코스카 진수부 참모 | |
1890년 9월 | 해군 소령 | |
1891년 7월 | 마야 함장 | |
1893년 10월 | 쵸카이 함장 |
2. 3. 청일 전쟁
청일 전쟁 발발 후, 가미무라는 신형 순양함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1894년 9월 17일 압록강 해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2] 그는 전성기 시절, 옛 사무라이 전통을 따른 거칠고 대담한 전투 지도자로 일본 제국 해군 전체에 알려졌다.3. 러일 전쟁
러일 전쟁 초기에 제2 함대 지휘관으로 임명된 가미무라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러시아 순양함 전대를 봉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러시아 함대가 탈출하여 1904년 4월과 6월 동해에서 일본 수송선을 침몰시킨 후, 그는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을 샀고, 폭도들이 그의 도쿄 자택을 공격했으며, 신문들은 그가 자결해야 한다고 암시했다.[8]
울산 해전에서 1904년 8월 14일 러시아 순양함 Рюрикru를 격침시키고 순양함 Громобойru|그로모보이}}와 Россияru|로시야}}에 피해를 입히면서 행동으로 자신을 변호했고, 정부와 일본 대중 모두에게서 인기를 되찾았다.[9] 이후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전에서 순양함 出雲일본어를 기함으로 제2함대를 지휘했다.[2]
3. 1. 히타치마루 사건
히타치마루 사건으로 히타치마루(常陸丸), 사도마루(佐渡丸)가 잇따라 격침되자, 가미무라 히코노조는 방위 책임자로서 질타를 받았다.[8] 의회에서는 야당 대의원으로부터 "짙은 안개라고 변명하는데, 짙은 안개(농무(濃霧))는 거꾸로 읽으면 무능(無能)하다, 가미무라는 무능하다"라는 비판을 받았다.[8] 민중으로부터는 "노탐 제독"(러시아의 스파이라는 뜻)이라고 비방을 받고 자택에 돌을 던지는 행위(투석)를 당했다.[8] 이 사태에 부하들은 분개했지만, 가미무라는 "집의 안사람은 배짱이 두둑하니 괜찮다"라며 웃으며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8] 가미무라의 아내는 매일 절에 참배하여 적 함대 발견을 기원했다.[8]3. 2. 울산 해전
울산 해전에서 가미무라 히코노조는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전멸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부하로부터 ‘남은 탄약이 없음’이라고 쓰여진 전언용 칠판을 받고 공격을 중단했다. 화가 난 가미무라는 칠판을 내던지고 짓밟았는데, 주변에서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침몰 직전까지 포격을 계속하던 러시아 제국 순양함 ‘류리크’의 승무원에게 “적이지만, 훌륭하다. 생존자는 모두 구출하고 정중하게 취급하라”고 명령하여 627명을 구조했다.[9] 이 전과와 구조 활동이 알려지자 일본 국민은 가미무라를 칭찬하기 바빴다. 이때의 상황을 노래한 군가 《히코노조 장군》은 오랫동안 일본 해군들이 애창했지만, 정작 가미무라 자신은 이 노래를 싫어했다고 한다.3. 3. 쓰시마 해전
쓰시마 해전에서 발틱 함대의 급선회 행동에 판단 오류를 범한 도고 헤이하치로의 지령에 대해, 제2함대 참모 사토 데쓰타로 중령의 정확한 의견 조언을 받아들여 독단적인 전투 작전을 펼쳤다. 혼자서 발틱 함대를 추격하여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했다. 가미무라의 판단과 행동이 쓰시마 해전의 승리를 확정 지었다.[2] 또한 발틱 함대를 북쪽에서 돌아가 제1함대와 협공했고, 나중에 러시아 해군 장교로부터 “일본 해군 함대 운동은 바로 신처럼 보였다”는 찬사를 들었다.[2] 가미무라는 쓰시마 해전에서 제2함대를 지휘했다.[2]4. 러일 전쟁 이후
러일 전쟁 초기에 제2함대 지휘관으로 임명된 가미무라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러시아 순양함 전대를 봉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04년 4월과 6월, 러시아 함대가 탈출하여 동해에서 일본 수송선을 침몰시키자 그는 대중의 불만을 샀다. 폭도들이 그의 도쿄 자택을 공격했고, 신문들은 그가 자결해야 한다고 암시했다.[2] 그는 1904년 8월 14일 울산 해전에서 러시아 순양함 Russian cruiser을 격침시키고 Russian cruiser와 Russian cruiser에 피해를 입히면서 명예를 회복했고, 정부와 일본 대중 모두에게서 인기를 되찾았다.[2] 이후 가미무라는 순양함 Japanese cruiser를 기함으로 하여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전에서 제2함대를 이끌었다.[2]
1905년 요코스카 해군 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된 가미무라는 1909년 제1함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 화족 귀족 제도를 통해 남작 작위를 받은 가미무라는 1910년 12월 1일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다음 해 최고군사회 의의 멤버가 된 가미무라는 1914년 5월 1일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 1916년에 사망했다.[2]
그의 묘는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의 묘혼지 사찰에 있다.
5. 평가 및 유산
가미무라 히코노조는 사쓰마 번 출신으로,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다. 펑도 해전에서 일본 해군 최초로 적 군함을 항복시켰고, 황해 해전에서도 무훈을 세웠다.[7] 러일 전쟁에서는 제2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울산 해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격파하고,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 함대의 진로를 막아 승리에 기여했다.
1907년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 제1함대 사령장관을 역임하고 해군 대장으로 퇴역했다. 군공으로 원수가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강직하고 거친 성격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다. 다만 원수 취임은 대장으로서 큰 공적을 세운 자라는 조건이 있었고, 러일 전쟁 당시 가미무라의 계급은 중장이었다.
가미무라는 성격이 급하고 싸움을 잘하며 술고래였지만, 정이 많고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다.[10] 청일 전쟁 당시 싸웠던 상대를 마음에 들어 하여 영국 유학을 돕기도 했다. 사토 테츠타로(쇼나이 번 출신), 이마무라 신지로・도키와 모리에(각각 요네자와 번・아이즈 번 출신), 마쓰다이라 야스오(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 당주) 등 막부 말기 적대 관계였던 번 출신 인물들을 부하로 두기도 했다.[11] 도쿄도 메구로구 아오바다이에는 그의 저택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 "가미무라 언덕"이라는 지명이 있다.[12]
5. 1. 긍정적 평가
울산 해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격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지만, "우리, 잔존 탄수 없음"이라고 적힌 전언용 흑판을 부하에게 건네받아 공격을 종료했다. 가미무라는 전언판을 내던지고 짓밟았지만, 그 형상은 주위를 떨게 만들 정도였다. 한편 침몰 직전에 이르러 마지막까지 포격을 계속했던 순양함 류리크의 승무원에 대해 "적이지만 훌륭한 자들이다. 생존자는 전원 구조하여 정중히 대하도록 하라"라고 명령하여 627명을 구조했다. 이 전과와 구조 활동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가미무라를 칭찬했고, 이때의 상황을 노래한 군가 '가미무라 장군' [9]은 오랫동안 일본 해군 장병들에게 애창되었지만, 가미무라 본인은 이 노래를 싫어했다고 전해진다.가미무라 장군(일부)은 사사키 노리카가 작사하고, 사토 모스케가 작곡하였다.
5. 2. 부정적 평가
러일 전쟁 초반, 제2함대 사령장관으로서 보급 항로 방위 임무를 맡았으나, 동해 특유의 짙은 안개와 블라디보스토크 함대 측의 종잡을 수 없는 공격에 시달렸다. 히타치마루 사건으로 히타치마루(常陸丸), 사도마루(佐渡丸)가 잇따라 격침되자, 방위 책임자로서 질타를 받았다. 의회에서는 야당대의원으로부터 "'''짙은 안개라고 변명하는데, 짙은 안개(농무(濃霧))는 거꾸로 읽으면 무능(무능(無能))하다, 우에무라는 무능하다'''"라는 비판을 받았고, 민중으로부터는 "'''노탐 제독'''"(러시아의 스파이라는 뜻)이라고 비방을 받고 자택에 투석을 당했다. 이 사태에 부하들은 분개했지만, 가미무라는 "집의 안사람은 배짱이 두둑하니 괜찮다"라며 웃으며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가미무라의 아내는 매일 절에 참배하여 적 함대 발견을 기원했다[8]。6. 기타
사쓰마번의 한학 사범이었던 가미무라 토이치로의 장남으로 사쓰마국가고시마군 가고시마성 아래 히라노초(현재의 가고시마현가고시마시히라노초)에서 태어났다[3]. 도바·후시미 전투, 아이즈 전쟁[4]에 참전하였다.
청일 전쟁에서는 방호순양함 아키츠시 함장으로 출정, 제1유격대에 소속되어 펑도 해전에서 포함 차오장을 항복시켰다. 이는 일본 해군이 적 군함을 항복시킨 최초의 사례이다[7]. 이어서 황해 해전에서도 무훈을 세웠다. 러일 전쟁에서는 제2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울산 해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격파하였고, 쓰시마 해전에서는 발트 함대의 진로를 막아 전승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07년(메이지 40년)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전후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 제1함대 사령장관을 역임하고 해군 대장으로 퇴역했다. 군공으로 원수가 될 가능성도 있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구로키 다메모토 육군 대장과 마찬가지로 강직하고 거친 성격이 평가받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다만 원수 취임은 대장으로서 큰 공적을 세운 자라는 조건이 있었고, 러일 전쟁 당시 가미무라의 계급은 중장이었다.
참조
[1]
서적
Nishida, Imperial Japanese Navy
[2]
서적
Paine, The Sino-Japanese War
[3]
웹사이트
上村彦之丞誕生地
http://www.city.kago[...]
鹿児島市
2013-05-26
[4]
서적
鈴木貫太郎 鈴木貫太郎自伝
[5]
서적
海軍兵学校物語
[6]
서적
異色の提督 百武源吾
[7]
서적
大山巌
[8]
서적
大海軍を想う
[9]
기타
元は第一高等学校寮歌『上村中将の歌』
[10]
기타
兵学寮の規律に嫌気がさして「たかが船頭になるより」と山本権兵衛に愚痴を漏らしている
[11]
간행물
会津会会報第3号
[12]
웹사이트
坂のプロフィール 上村坂
http://www.sakagakka[...]
坂道学会
2023-01-02
[13]
기타
今村信次郎、常盤盛衛とは海兵30期の同期生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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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526号、大正3年5月2日
1914-05-02
[15]
간행물
官報第261号「叙任及辞令」1884年5月15日
1884-05-15
[16]
간행물
官報第2541号「叙任及辞令」1891年12月17日
1891-12-1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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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3453号「叙任及辞令」1895年1月4日
1895-01-04
[18]
간행물
官報第4046号「叙任及辞令」1896年12月22日
1896-12-2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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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4918号「叙任及辞令」1899年11月21日
1899-11-21
[20]
간행물
官報第6101号「叙任及辞令」1903年10月31日
1903-10-31
[21]
간행물
官報第6710号「叙任及辞令」1905年11月9日
1905-11-09
[22]
간행물
官報第7640号「叙任及辞令」1908年12月12日
1908-12-12
[23]
간행물
官報第8552号「叙任及辞令」1911年12月21日
191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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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534号「叙任及辞令」1914年5月12日
1914-05-12
[25]
간행물
官報第1925号「叙任及辞令」1889年11月27日
1889-11-27
[26]
간행물
官報第3430号「叙任及辞令」1894年12月3日
189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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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3676号「叙任及辞令」1895年9月28日
1895-09-2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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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3830号・付録「辞令」1896年4月9日
1896-04-09
[29]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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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간행물
官報第5548号「叙任及辞令」1901年12月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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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웹사이트
中野文庫 - 旧・勲一等瑞宝章受章者一覧(戦前の部)
https://web.archive.[...]
[32]
간행물
官報第6573号「叙任及辞令」1905年5月31日
1905-05-31
[3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1906年12月30日
1906-12-30
[34]
간행물
官報第7272号「授爵敍任及辞令」1907年9月23日
1907-09-23
[35]
간행물
官報第1310号・付録「辞令」1916年12月13日
1916-12-13
[36]
간행물
官報第1209号「叙任及辞令」
1916-08-10
[37]
간행물
官報第7200号「叙任及辞令」
1907-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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